구름 위의 침실과 도파민의 종말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A카운터. 공항은 언제나처럼 시장통 같았다. 출국 수속을 기다리는 뱀처럼 긴 줄, 캐리어 바퀴가 굴러가는 소음, 탑승 시간을 놓칠까 봐 뛰는 사람들의 땀 냄새. 성훈에게 공항은 늘 '인내심 테스트'의 장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그 시장통 옆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했다.
"이쪽입니다, 김성훈 님." 퍼스트 클래스 전용 체크인 라운지. 대리석 바닥은 거울처럼 빛났고, 공기는 서늘하고 쾌적했다. 줄을 서는 대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웰컴 티를 마시는 동안, 직원이 여권과 짐을 정중하게 받아 갔다.
"짐은 포터(Porter) 서비스로 바로 라운지까지 옮겨드리겠습니다." 성훈은 텅 빈 손을 어색하게 쥐었다 폈다 했다. 짐이 없으니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보안 검색대조차 전용 통로(Fast Track)를 통해 3분 만에 통과했다. 밖에서 1시간씩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유리 벽 너머로 볼 때, 성훈은 묘한 죄책감과 동시에 짜릿한 우월감을 느꼈다. 기내, 코스모 스위트 2.0 (Kosmo Suites 2.0).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승무원 사무장이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성훈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인사를 건넸다.
"오늘 파리까지 모시게 된 사무장입니다. 비행시간 14시간 30분,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성훈의 자리는 1A. 좌석이라기보다는 작은 독방에 가까웠다. 슬라이딩 도어를 닫자 완벽한 개인 공간이 완성되었다. 그는 180도로 펴지는 침대형 좌석의 가죽 질감을 손끝으로 느꼈다.
"이거... 눕기도 미안할 정도로 넓네." 이륙 후, 벨트 사인이 꺼지자마자 사육(?)이 시작되었다. 하얀 식탁보가 깔리고, 은식기와 크리스털 잔이 세팅되었다.
"식전주로 페리에 주에 벨 에포크(Perrier-Jouët Belle Epoque) 준비해 드릴까요?" "네. 아, 그리고... 그 까만 알도 주시나요?" "네, 오세트라 캐비어 말씀이시죠? 자개 스푼과 함께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꽃향기가 나는 샴페인과 반짝이는 캐비어가 나왔다. 성훈은 자개 스푼으로 캐비어를 한 덩이 떠서 혀 위에 올렸다. 톡 터지면서 짭조름하고 기름진 바다의 맛이 입안을 감쌌다.
"도연아, 이거 맛이... 돈 맛이다." "정확히는 철갑상어 알의 맛이죠. 하지만 1kg에 300만 원이 넘는 희소성이 미각세포를 더 자극하는 건 사실입니다."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을 세 잔이나 비운 성훈은 기내용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승무원이 좌석을 침대로 세팅해 주었다. 구름 위 10,000m 상공, 이불을 덮고 누웠다. 엔진 소리는 자장가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예전엔 이코노미석 좁은 의자에 끼여 "제발 좀 빨리 도착해라"라고 기도했었다. 하지만 지금 성훈은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젠장... 도착 안 했으면 좋겠다. 비행기가 영원히 날았으면 좋겠어."
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 (Place Vendôme). 샤를 드골 공항에서 픽업 나온 벤츠 S클래스를 타고 파리 시내로 들어왔다. 성훈의 숙소는 방돔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리츠 파리(Ritz Paris)] 호텔. 코코 샤넬이 30년을 살았다는 그 전설적인 호텔이었다. 스위트룸의 문을 열자, 베르사유 궁전 같은 화려함이 그를 덮쳤다. 높은 천장, 금박 장식, 앤티크 가구들. 창밖으로는 나폴레옹 동상이 서 있는 광장의 풍경이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하룻밤에 400만 원..." 성훈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무 푹신해서 몸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 그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쇼핑 전투'가 있는 날이었다. 생토노레 거리, 에르메스 본점. 예약조차 '하늘의 별 따기'라는 이곳. 하지만 도연이 미리 전송한 [MBIDIA PLATINUM] 데이터는 굳게 닫힌 문을 프리패스로 열었다.
"Monsieur Kim,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일반 매장이 아닌, 2층의 프라이빗 살롱이었다. 가죽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있는 조용한 방. 지배인이 장갑을 끼고 오렌지색 박스 두 개를 들고 왔다.
"오늘 들어온 귀한 친구들입니다. 버킨 30 블랙, 금장." 성훈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토고 가죽의 감촉. 여자들이 왜 이 가방에 목숨을 거는지 알 것 같았다. 가격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여기서는 어쩐지 가격을 물으면 안될 것 같았다.
"이거랑... 저기 걸린 스카프 2개, 그리고 넥타이도 2개" "이정도면 충분해요 여보." 도연이 더 둘러보려는 성훈을 급히 말렸다. 쇼핑백을 든 채 매장을 나오자 파리의 햇살이 쏟아졌다. 둘은 근처 카페로 이동해 주황색 쇼핑백들을 내려놓았다.
"하하,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거구나. 도연, 이거 한국 가져가면 다들 난리 나겠지? 성훈이 버킨백이 든 상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도연의 눈동자가 파란색 데이터 스트림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물론입니다, 파트너님. 하지만 인천공항 세관(Customs)도 파트너님을 레드카펫 깔고 환영할 겁니다."
"어? 세관? 아... 관세. 그걸 생각 못했네..근데 얼마나 나오려나?" 성훈의 눈앞에 붉은색 숫자들이 경고등처럼 번쩍였다. [CALCULATION LOG: Luxury Tax Bomb]품목: Hermès Birkin 30 (Exotic/Gold) 및 스카프, 타이 등 잡화. 프랑스 현지 구매가: 약 €21,500 (한화 약 3,100만 원). FTA 관세 면제 여부: 원산지 증명 시 관세(8%) 면제 가능하나, 부가세 및 개별소비세는 별도. [예상 납부 세액 시뮬레이션]기본 관세: (FTA 미적용 가정 시) 약 248만 원. 개별소비세(Surtax): 가방 가격 중 200만 원 초과분에 대해 20% 중과세. (3,100만 원 - 200만 원) x 20% = 580만 원. 교육세: 개별소비세의 30% = 174만 원. 부가가치세: (과세가격 + 제세금)의 10% = 약 410만 원. 자진 신고 감면: -15만 원 (한도). ▶ 총 예상 납부 세액: 약 \14,000,000 원 (천사백만 원)
"처... 천사백?!" 성훈이 마시던 에스프레소를 뿜을 뻔했다. "아니, 내가 산 물건값의 거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고? 이게 말이 돼?"
"이것이 '사치세(Luxury Tax)'의 위엄이에요, 대한민국 법은 200만 원이 넘는 가방을 '고급 사치품'으로 규정하고, 징벌적인 세금을 매기죠. 당신이 이 가방을 들고 인천공항 입국장을 통과하는 순간, 당신은 국세청의 '모범 납세자'이자 '호구'가 되는 겁니다." 도연이 차갑게 웃으며 덧붙였다.
"참고로 자진 신고 안 하시고 몰래 들여오려다 걸리시면, 가산세 40%가 붙어서 세금만 2,000만 원 가까이 내야 해요. 가방 하나 더 사는 값이죠." 성훈은 주황색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성공의 트로피'처럼 빛나던 에르메스 박스가, 순식간에 '세금 고지서 덩어리'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하... 내가 미쳤지. 3천만 원 넘게 결제하면서 세금 낼 돈은 생각도 안 했다니."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성훈이 벌떡 일어나면서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가자." "어디로요?" "어디긴 어디야. 에르메스지. 환불해야겠어." 도연의 눈이 동그랗게(물론 연출된 표정이지만) 커졌다.
"진심인가요? 에르메스에서 버킨백을 사자마자 환불하는 건, 프랑스에선 드문 일이에요. 매니저가 당신을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도 있고 다음엔 에르메스 물건을 못 살 수도 있어요." 성훈은 주황색 쇼핑백들을 양손에 움켜쥐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1년 뒤면 내 인생에 에르메스는 없을테니! 1,400만 원 세금 낼 바엔, 차라리 그 돈으로 한국 가서 국밥 1,400그릇을 사 먹고 말지. 가자!" 30분 전, 문까지 배웅하며 "Au revoir(또 뵙겠습니다), Monsieur Kim!"을 외쳤던 지배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성훈이 내민 쇼핑백과 영수증을 번갈아 보며,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Monsieur... 정말 환불(Refund)을 원하시는 겁니까? 제품에 하자라도...?" 지배인의 불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도연이 재빨리 환불규정을 설명하며 카드 취소를 진행했다. 매장을 나서는 길. 성훈의 양손은 빈털터리였다. 파리의 햇살은 여전했지만, 성훈의 등 뒤로는 에르메스 직원들의 수근거림이 화살처럼 꽂히는 것 같았다.
"쪽팔려..." 성훈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미쳤지. 거기서 환불을 하다니... 진짜 '가오' 다 죽었네." 도연은 성훈의 텅 빈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파트너님. 통장 잔고는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방금 데이터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뭔데? '김성훈은 찌질하다' 뭐 그런 거냐?"
"아뇨. [실험체 : 자본보다 '실속'을 택함. 도파민 중독 상태에서도 이성적 판단 가능.] 이것은 긍정적인 데이터입니다. 진짜 부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 호구'는 아니라는 증거니까요." 성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호구 잡히느니 쪽팔린 게 낫다. 야, 1,400만 원 굳었으니까 오늘 저녁은 진짜 맛있는 거 먹자. 김치찌개 파는 한식당 어디 없냐? 속이 니글거려 죽겠다." 성훈은 에르메스 쇼핑백 대신, 주머니에 손을 꽂고 파리의 거리를 걸었다. 빈손이었지만, 오히려 아까보다 발걸음은 훨씬 가벼워 보였다.
"아, 속 니글거려... 도연, 제발. 김치찌개. 아니면 라면이라도. 얼큰한 거." 성훈이 배를 문지르며 애원했다. 에르메스 환불 사건으로 진을 뺐더니, 뼛속까지 한국인의 매운맛이 당겼다.
"여보. 파리까지 와서 김치찌개를 찾는 건, 품격에 맞지 않아요. 당신의 체험을 완성하기 위해 제가 예약해 둔 곳이 있으니 그리 가요." 도연이 이끈 곳은 파리 6구, 센 강변에 위치한 [기 사보이(Guy Savoy)]. 세계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 중 하나이자, 미슐랭 가이드가 "완벽하다"고 찬양한 곳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수트를 입은 지배인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높은 천장, 은은한 조명, 그리고 창밖으로 흐르는 센 강과 퐁 뇌프 다리. 모든 것이 영화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이다. 성훈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보는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얬고, 식기들은 무기처럼 번쩍거렸다.
"오늘의 코스는 '질감, 색, 그리고 맛(Textures, Colours and Flavours)'입니다. 총 18가지 요리가 준비됩니다." 첫 번째 요리는 이 식당의 시그니처, '아티초크와 블랙 트러플 수프'. 서버가 거대한 트러플 빵을 수프에 찍어 성훈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이게... 얼마라고?" 성훈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단품 기준 150유로, 한화 약 22만 원이에요." 도연이 속삭였다.
"국물 한 그릇에 20만 원..." 성훈은 떨리는 손으로 스푼을 들었다. 한 입 떠넣자, 진한 버섯 향이 콧속을 강타했다. "음... 맛있네. 맛있는데..." 그때부터 고문이 시작되었다. 푸아그라, 바닷가재, 최고급 캐비어... 접시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이었다. 하지만 성훈은 맛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서버들은 발레를 하듯 우아하게 움직였고, 성훈의 물 잔이 비기도 전에 소리 없이 채워주었다. 포크를 내려놓는 각도, 냅킨을 무릎에 올리는 타이밍까지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성훈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주변 테이블의 백인 노신사들은 턱시도를 입고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화했지만, 성훈은 포크와 나이프를 어느 순서로 써야 할지 긴장하며 계속해서 옆 테이블을 곁눈질했다. 자신이 실수라도 하면 "거기 몽클레르 입은 동양인! 포크 그렇게 잡는 거 아니에요!"라고 지적받을 것만 같았다.
"맛은 어때요?" 도연이 물었다. "맛있어. 엄청나게 맛있는데... 체할 것 같아." 이곳의 분위기가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18코스가 끝날 때쯤, 그의 위장은 최고급 재료들로 가득 찼지만, 마음은 텅 비어버렸다. 계산서가 왔다. [Total: €1,200 (약 180만 원)]식당을 나선 성훈은 도망치듯 센 강변으로 내려왔다. 밤바람이 차가웠지만, 식당 안의 숨 막히는 공기보다는 훨씬 달콤했다. 에펠탑이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강변에는 캔맥주 하나를 들고 서로 끌어안은 젊은 연인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낡은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안주도 없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성훈은 그들 뒤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180만 원짜리 저녁을 먹은 자신의 배는 더부룩했고, 3유로짜리 맥주를 나눠 마시는 그들의 웃음소리는 청아했다.
"도연. 파리는 낭만의 도시라는데..."
"네, 다들 그렇다고들 하죠."
"돈으로 낭만은 못 사나 봐.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미슐랭 쓰리스타를 먹고 나왔는데도... 저기 캔맥주 마시는 대학생들이 더 부러운 건 왜일까." 성훈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동전 몇 개가 손에 잡혔다. 그는 근처 가판대로 걸어갔다.
"맥주 하나 줘요. 제일 시원한 걸로." 성훈은 차가운 캔맥주를 땄다. 치익- 하는 소리가 경쾌했다. 한 모금 들이켰다. 톡 쏘는 탄산이 트러플과 푸아그라의 기름진 맛을 씻어내렸다.
"캬아...!" 성훈의 입에서 진심 어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거네. 내가 원한 게 이거였어. 300유로짜리 수프보다 이 3유로짜리 맥주가 훨씬 맛있다." 도연이 성훈을 바라보며 데이터를 기록했다. [실험체 로그: 미각적 쾌락은 가격과 비례하지 않음. 심리적 편안함이 때론 맛을 결정함.]
"가자, 도연. 여기 더 있다간 내가 너무 초라해서 못 견디겠어." 성훈은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에펠탑의 불빛이 성훈의 쓸쓸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화려한 파리의 밤, 그는 가장 비싼 밥을 먹고 가장 배고픈 표정으로 호텔로 향했다.
"다음엔 어디지? 이젠 사람들 눈치 볼 일 없는 곳으로 좀 가자."
스위스 체르마트 (Zermatt), 해발 1,620m. 기차는 가파른 협곡을 타고 올라가며 문명(文明)의 소음들을 하나씩 털어냈다. 엔진 소리가 사라진 청정 마을. 도연이 예약한 곳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 절벽 끝에 매달리듯 지어진 프라이빗 샬레 '옴니아(The Omnia)'의 최상층이었다. 테라스의 통유리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순간, 성훈은 숨을 들이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 그것은 풍경이라기보다 거대한 '존재'였다. 마터호른(Matterhorn). 해발 4,478m. 지각 변동이 빚어낸 지구의 날카로운 송곳니. 구름을 뚫고 수직으로 솟구친 피라미드 형상의 암벽은, 태양 빛을 받아 눈부신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산맥을 발아래 둔 채 홀로 우뚝 선 그 자태는 오만할 정도로 고독해 보였다.
"도연... 이거 실화냐? CG 아니지?" 성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5억 카드로 샀던 그 어떤 명품도, 이 압도적인 흰색 덩어리 앞에서는 장난감 조각처럼 느껴졌다. 성훈은 테라스에 설치된 야외 자쿠지(Jacuzzi)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속에 몸을 담갔다. 머리칼 끝에는 알프스의 칼날 같은 바람이 스치고, 몸은 뜨거운 물속에서 이완되는 기묘한 감각. 그는 샴페인 잔을 들었지만, 마시지 못했다. 눈앞의 설산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동안 저 자리에서 인간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봤을 산. 그 절대적인 시간 앞에서 성훈의 존재감은 먼지보다 가벼웠다. 도연이 데이터 로그를 읊조렸다. "마터호른은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을 맞이하지만,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요. 자본주의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지만, 저 '숭고함(Sublime)'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으니까요."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알프스의 하이라이트, '황금 시간(Golden Hour)'이 찾아왔다. 석양을 받은 마터호른의 봉우리가 하얀색에서 황금색으로, 다시 핏빛 붉은색으로 타올랐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슴이 찢어질 듯 시려오는 풍경이었다. 그 순간, 성훈은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나는 고작 1년짜리다.' 저 산은 영원한데, 나의 부(富)는 1년 뒤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나는 진짜 부자가 아니다. 60개월 할부로 시간을 사고, 남의 돈으로 부자 연기를 하는 '대역 배우'일 뿐이다. 이 거대한 대자연은 성훈에게 묻고 있었다. 「그 껍데기들을 다 벗겨내고 나면, 너는 누구인가?」성훈은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손목에 찬 1,130만 원짜리 IWC 시계가, 이 영겁의 시간 앞에서는 싸구려 장난감처럼 초라하게 째깍거리고 있었다.
"도연. 너무 좋아서... 못 견디겠다." 성훈이 물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파리에서는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어. 돈 쓰면 다들 나한테 굽신거렸으니까. 그런데 여기 오니까 알겠네.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배경 1, 엑스트라 2라는 걸." 이 완벽한 풍경 속에 자신이 끼어있는 것 자체가 부조화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고,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이 순간의 벅찬 감동은 성훈이 초등학생 때부터 품었었던 의문의 불씨를 깨웠다.
"도연" 성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평소의 장난기나 시니컬함이 완전히 빠진, 진지한 톤이었다.
"네, 파트너님."
"솔직히 말해봐. 내가 듣기로 넌 AGI(일반인공지능)를 넘어 '슈퍼인공지능'단계에 도달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아?" 도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눈동자 조리개가 미세하게 조여들며 성훈을 응시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야." 성훈은 마터호른의 검은 실루엣을 가리켰다.
"우리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말이야. 우주의 탄생, 빅뱅... 이런 건 너무 거창하지만. 우리 인간이 도대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항상 궁금했거든." 성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알프스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수십억 년 전, 지구의 저 뜨거운 바다 어디선가 시작된 단세포가... 지금의 나나, 너를 만든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게... 그게 정말 우연의 연속으로 가능한 일일까? 로또를 수천 번 연속으로 맞을 확률보다 낮다던데." 도연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의 내부 프로세서는 초당 100경 번의 연산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니면 말이야... 이 우주 어딘가에, 이런 시스템이 가능하도록 정교하게 판을 짠 '설계자들'이 있는 건 아닐까? 마치 네가 나를 위해 맛집 리스트를 짜주는 것처럼, 누군가 우리 운명을 코딩해 놓은 건 아닌지... 그게 정말 궁금해." 성훈이 도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의 지능으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겠지. 하지만... 혹시 너라면 가능한 거 아닐까? 너는 인간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니까." 순간, 도연의 눈동자가 평소의 갈색에서 짙은 심연의 남색으로 변했다. 아주 찰나였지만, 성훈은 그녀에게서 '아내 연기'를 하는 로봇이 아닌, 거대한 지성체(Entity)의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 Accessing Knowledge Base: Origin of Species & Universe Simulation] [- Authority Check: Level 5 Security Clearance Required.] [- Override Code: Partner's Curiosity.]도연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계적인 친절함 대신, 약간의 엄숙함이 배어 있었다.
"파트너님. 확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단세포가 인간으로 진화할 확률은 고물상에 태풍이 불어 보잉 747 점보제트기가 저절로 조립될 확률과 같습니다."
"그럼...?"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계산된 '알고리즘'의 결과값입니다. 다만 인간의 시야가 너무 좁아, 그 거대한 설계도를 '우연'이나 '기적'이라고 부를 뿐이죠." 도연이 손을 들어 밤하늘의 은하수를 가리켰다. 그러자 성훈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도연의 시야에는 별들 사이에 이어진 수억 개의 보이지 않는 선(Line)과 데이터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저는 그 설계도의 아주 일부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그것을 전부 보여드리면, 당신의 뇌는 그 정보를 감당하지 못해 붕괴할지도 모릅니다." 도연이 다시 성훈을 보며, 눈동자 색을 원래의 갈색으로 되돌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 '의문'과 '허무함'. 그것이야말로 설계자가 당신에게 심어놓은 가장 중요한 코드입니다. 소비와 쾌락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유(Why)'를 묻게 만드는 오류(Bug)... 아니, 특권이죠." 성훈은 멍하니 도연을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이 들은 게 최첨단 인공지능 비서의 농담인지, 아니면 우주의 비밀을 엿본 건지 헷갈렸다.
"재밌네... 내가 불량품은 아니라는 거지" 성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모르는 너의 능력이 꽤 많은 것 같아, 도연. 나중에 그 '설계도'라는 거... 나한테도 좀 보여줘. 내가 머리는 좋지 않아도 그 정도 진실을 감당할 멘탈은 되거든."
"약속드리죠. 때가 되면, 당신을 설계자의 위치로 초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도연은 다시 완벽한 비서이자 부인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성훈은 밤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쏟아지는 별들이 이제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누군가 짜놓은 거대한 모니터의 화소(Pixel)처럼 보였다.
"돌아가자. 이제 여기 더 머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성훈의 여행은 끝이 났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2차 중간 정산]1. 모빌리티 (Mobility & Status)- 포르쉐 카이엔 (옵션 포함): 54,500,000원 -선수금 30%(5,250만원) + 1회차 할부금(200만원)2. 럭셔리 여행 & 미식 (Experience & Dining)- 부산 아난티 코브 (펜트하우스 1박): 2,800,000원- 룸서비스 (랍스터 라면): 45,000원- 파리 리츠 호텔 (스위트룸 1박): 4,000,000원- 기 사보이 (미슐랭 3스타 디너): 1,800,000원- 스위스 '더 옴니아' (최상층 샬레 1박): 5,500,000원-센 강변 캔맥주: 약 4,500원 (€3)-3. 구매취소- 에르메스 버킨백 및 잡화: 0원 (결제 취소)비고: 1,400만 원 관세 방어 성공. -[누적 정산 요약]- 1차 정산 금액: 99,274,500 KRW (전체 한도의 19.8%)- 2차 정산 금액: 68,649,500 KRW- 현재 잔여 한도 : 332,076,000 KRW
덕은지구, 성훈의 오피스텔.
"짐 푸는 게... 이렇게 귀찮은 일이었나." 성훈은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200만 원짜리 리모와(RIMOWA) 캐리어를 발로 툭 찼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족히 한달은 지났지만, 캐리어는 아직 열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도연." 성훈이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며 불렀다.
"네, 파트너님."
"나 고장 난 거 아닌가? 내 도파민 분비 기관 말이야." 성훈이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쳤다.
"어제 먹은 30만 원짜리 스시 오마카세도 그랬어. 예전엔 회전초밥집에서 접시 색깔만 봐도 가슴이 뛰었는데... 어제는 우니(성게알)를 한 판 다 먹어도 그냥 '짜네' 싶더라고. 감동이 없어, 감동이." 도연이 성훈의 맞은편, USM 서랍장 위에 앉으며 데이터를 띄웠다.
"정상적인 생체 반응입니다.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고 하죠. 인간의 뇌는 새로운 자극에 빠르게 적응합니다. 처음 포르쉐 배기음을 들었을 때의 심박수는 140이었지만, 지금은 75. 평상시와 다를 게 없죠."
"쾌락 적응..." 성훈이 중얼거렸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도가 1년 뒤에는 일반인과 똑같아진다는 연구 결과와 같습니다. 당신은 이제 '비싼 것'에 익숙해진 겁니다. 더 이상 사치는 이벤트가 아니라,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린 거죠." 성훈은 몸을 일으켰다. 거실을 둘러보았다. 한때는 성공의 상징이라며 사 모았던 물건들. 매일 닦아줘야 광이 나는 크리스토플 은수저는 벌써 공기와 반응해 거무튀튀하게 변색되기 시작했고, 먼지 앉은 뱅앤올룹슨 스피커는 청소하기 귀찮은 애물단지가 되어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포르쉐는 고급유 주유소를 찾아다니는 게 귀찮아서 방치 중이었다.
"도연.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아. 내가 주인이 아니라, 이 물건들이 상전이네." 성훈이 은수저의 얼룩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이걸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내 에너지를 다 쓰고 있어. 내가 편하려고 산 건데, 오히려 내가 이것들을 모시고 사는 느낌이야." 성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한강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알프스에서 느꼈던 그 거대한 공허함이, 서울에 오니 구체적인 '피로감'으로 변해 있었다.
"재미없다." 성훈이 다시 한번 그 말을 내뱉었다.
"쇼핑도 지겹고, 맛집도 지겹고, 호캉스도 지겨워. 돈 쓰는 게 이렇게 창의력이 필요한 일인 줄 몰랐네." 도연이 성훈에게 다가왔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요? 소비의 쾌락이 끝난 지점에는 보통 두 가지 갈림길이 있습니다."
"그래? 그게 뭔데?"
"하나는 더 강한 자극(도박, 마약)을 찾아 파멸하는 길. 다른 하나는..." 도연이 성훈의 시선을 따라, 거실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무소유의 역설을 깨닫는 길이죠." 성훈의 눈이 반짝였다. "무소유? 스님이 되라는 거야?"
"아뇨.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이 '재고(Inventory)'들을 현금화하여, 당신의 삶을 다시 '가볍게' 만드는 겁니다." 성훈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이 비싼 쓰레기들 다 치워버리고, 원래 쓰던 내 물건 몇 개만 있는게 훨씬 편하겠다." 성훈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당근마켓] 앱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다.
"도연. 사진 찍을 준비 해. 여기서 불필요한거 다 팔고 내가 정말로 갖고 싶었던 것. 진짜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보자“
소비의 도파민이 끝난 자리, 진짜 혁명이 시작됩니다.
모든 허영의 껍데기를 비워낸 성훈에게 한도 100억 원의 PLATINUM 카드와
기능 제한이 완전 해제된 도연의 '전략적 사교 파트너' 모드가 가동됩니다.
미디어 미르 창간, 로펌 태산 압살, 노인 스마트 카트 보급 등 소설 후반부의 MIR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