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탄생과 첫 번째 전투복
2026년 10월 14일. 오후 여의도 (사)대한민국미래전략협회. 김성훈 팀장(42세)의 책상 위에는 믹스커피 봉지 세 개가 빈 껍데기만 남은 채 널려 있었다. 그는 3개월을 꼬박 준비한 '국가 미래 전략 포럼' 기획안의 마지막 오탈자를 확인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다음 날 아침, 협회 상무가 그의 자리로 다가왔다.
"김 팀장, 역시 자네야. 어제 회장님 보고 들어갔는데, 김 팀장이 정리한 '저출산 대응 시나리오', 그거 토시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장관님 보고 올리기로 했어." 성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지난 3개월의 야근과 주말 반납이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맛에 이 일을 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 기여했다는 보람.
"감사합니다 상무님. 팀원들이 고생 많았죠." “: 같은 날 저녁, 강남 깜부치킨강남대로의 밤공기는 언제나 욕망의 냄새를 풍긴다. 타이어 타는 냄새, 값비싼 향수, 그리고 튀김 기름의 쩐내. [깜부치킨] 서초점 주변은 경호원들로 인간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그 안쪽, 대한민국 재계 서열 1, 2위를 다투는 S사 이 회장과 H사 정 회장, 그리고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엠비디아의 존슨 황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카스] 생맥주 피처와 반쯤 뜯어먹은 마늘 전기구이가 놓여 있다. 시가총액 합계 수천조 원의 거인들이 2만 원짜리 치킨을 맨손으로 뜯는 이 기묘한 풍경 구석에, 김성훈이 1시간째 웅크리고 있었다. (사)대한민국미래전략협회 기획팀장. 그는 우연히 알게된 회장들의 치킨회동 소식에 사진이라도 하나 얻어 협회 홍보에 사용할 요량으로 이곳에 잠입했다. 매장 안에 취기가 한창일 무렵. 존슨 황이 기름 묻은 손을 닦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이 다이내믹한 밤을 기념하며, 제가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성훈은 재빨리 휴대폰을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Y-143은 연구소 밖의 세상을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엠비디아의 비밀 병기, Y-143." "단순한 AI가 아닙니다. 매장의 소음이 잠시 잦아들었다. 인간의 모순된 욕망까지 이해하는 괴물, 초지능(Superintelligence)의 탄생입니다. 그는 투명한 추첨함에서 번호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 한 분께, Y-143을 1년간 무상 임대해 드립니다. 지난 3년. 엠비디아의 모든 자원을 투입해 진화한 Y-143의 제작비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지만 앞으로 학습할 데이터의 가치는 그 이상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단, 절대 그 누구에게도 당첨 사실을 알리지 마세요. 앞으로 1년간 우리는 당첨자와 함께 인류의 미래를 건 모험을 떠날 것입니다. 자, 행운의 베타 테스터는... Number 143!"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매장은 취기로 가득했고, 회장들도 처음 듣는 얘기라 크게 집중하지 않는 모습이다. 다만 화장실 옆 구석 자리에서 처음부터 이 장면을 지켜본 성훈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헉! 나잖아!" 존슨 황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당첨되신 분은 번호표를 확인하시고. 3일 안으로 엠비디아 코리아 R&D 센터로 오시면 됩니다. 번호표를 제시하면 당신의 새로운 파트너와...작은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깜짝 이벤트는 싱겁게 끝났다, 매장 안의 손님들은 음악 소리에 섞인 존슨 황의 중대발표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또 AI 얘기네"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 시각. 성훈은 뒷문으로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며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초지능? AI? 그게 다 무슨 말이야. 당장 이번 달 카드값 200만 원이 구멍 난 그에게, 존슨 황의 제안은 그저 술 취한 억만장자의 농담처럼 들릴 뿐이었다.
: 다음 날, 엠비디아 코리아 비밀 연구소 지하 5층. 밤새 고민했는지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로 성훈은 혹시 돈이 될지도 모르니, 당첨선물이 무엇인지만 확인해보자는 심정으로 약속된 장소를 찾았다. 성훈은 보안 요원의 안내를 받아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공기 중에는 먼지 한 톨 없는 멸균실 특유의 서늘한 냄새가 났다.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밀실의 문이 열렸다. 방 한가운데, 수석 연구원 미셸 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흰색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셨군요, 미스터 김." 미셸 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녀는 태블릿을 조작하며 성훈에게 다가왔다.
"어제 존슨 황 CEO께서 말씀하신 Y-143입니다. 우리는 그녀를 '도연(Do-yeon)'이라고 부릅니다." 미셸이 손짓하자, 뒤에 있던 천이 스르륵 벗겨졌다. 성훈은 숨을 멈췄다. 그곳에는 기계가 없었다. 우아한 단발머리, 잡티 하나 없는 상아색 피부, 세련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30대 초반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감겨 있는 눈꺼풀의 속눈썹 하나까지, 그것은 완벽한 생물학적 인간의 형상이었다.
"이게... 로봇이라고요?" 성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의료용 인공 피부와 미세 근육 액추에이터 4천 개를 사용해 인간의 표정을 99.9% 구현했습니다. 그녀는 AGI(일반인공지능)를 넘어선 단계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당신의 감정까지 읽어낼 거에요." 미셸은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색 봉투를 성훈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건, 도연이 서울을 학습하는 데 필요한 '연료'입니다." 성훈이 봉투를 열었다. 묵직한 메탈 소재의 검은색 카드. [MBIDIA BLACK]이라는 로고가 빛을 받아 번쩍였다.
"한도는 5억 원입니다."
"오... 5억이요?" 성훈의 손에서 카드가 미끄러질 뻔했다.
"조건은 하나입니다. 이 돈은 저축하거나 빚을 갚는 데 쓸 수 없습니다. 오직 도연과 함께하는 '경험'과 '소비'에만 사용하십시오. 1년 뒤 남은 잔액은 전액 회수됩니다. 오직 소비한 물건과 경험만이 성훈씨의 소유입니다? 가장 비싸고, 가장 쓸모없는 것들까지 마음껏 경험해 보세요. 그 과정에서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데이터가 우리가 원하는 값어치니까요." 인공지능 로봇과 5억 원짜리 카드. 평생을 최저가 검색과 6천 원짜리 식권에 목매던 성훈에게, 그것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파트너를 깨우시죠." 미셸의 신호에 따라, 성훈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앉아 있는 여성의 손을 잡았다. 차가울 줄 알았던 손에서, 놀랍게도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위잉- 아주 미세한, 모기 날갯짓보다 작은 구동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떴다. 깊은 갈색 눈동자. 그 안에는 데이터의 홍수 대신, 성훈을 꿰뚫어 보는 차분한 지성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입꼬리를 우아하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 성우보다 더 완벽한 발성, 그러나 어딘가 서늘한 친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반갑습니다. 파트너님." 도연은 성훈의 낡은 패딩 소매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저는 도연입니다. 오늘부터 365일간, 당신이 잃어버린 욕망의 지도를 다시 그려드리겠습니다." 성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쥐고 있던 5억짜리 카드가 손바닥의 땀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계약이었다. 자본주의의 신과 맺은, 1년짜리 영혼의 임대 계약.
서울 여의도, (사)대한민국미래전략협회 사무실. 성훈은 자신의 낡은 사무용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는 5억 원의 한도가 장전된 [MBIDIA BLACK] 카드가 마치 뜨거운 석탄처럼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김 팀장, 잠깐 이리 와봐." 상무의 호출이었다. 성훈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지난 3개월 간 그가 주말도 없이 갈아 넣은 '국가 미래 전략 보고서'의 성과를 듣는 자리였다. 보고서 표지에는 협회장의 이름만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지만, 성훈은 그 내용을 채운 것이 자신의 피와 땀임을 알기에 일말의 기대감을 품었다. 상무실에 들어서자, 상무는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두툼한 흰색 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수고했어. 장관님 반응이 아주 좋아. 자네 기획안 덕분에 우리 협회 위상이 꽤 올라갈 거야." 성훈의 시선이 봉투에 꽂혔다. 두께가 제법 되었다. '드디어... 인정받는 건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정도 두께면 적어도 100만 원,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밀린 대출 이자를 갚고, 오랜만에 소고기라도 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 근데 알다시피 이번에 로비 리모델링하느라 예산이 바닥나서 말이야. 현금 보너스는 어렵게 됐어. 대신 이거, 특별히 챙겼으니 팀원들 잘 챙기고." 성훈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빳빳한 종이 뭉치가 손에 잡혔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얼굴은 없었다. [구내식당 식권 (6,000원) x 50매]총액 30만 원. 성훈은 멍하니 식권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50장. 그것은 '앞으로 밖에서 사 먹지 말고 회사 지하에서 주는 밥 먹고 열심히 일해라'는 무언의 명령 같았다. 그가 국가를 위해 바친 지난 시간과 열정이, 고작 두 달 치 점심값으로 환산되어 돌아왔다.
"부족한가? 50장이면 꽤 큰 건데. 거기 된장찌개랑 제육볶음 예술이잖아." 상무의 뻔뻔한 웃음 뒤로, 성훈의 귓속에서 '뚝'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그가 15년 동안 지켜온 인내심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성훈의 손이 안주머니로 향했다. 차가운 메탈 카드.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견뎌온 것은 가난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6천 원짜리 식권으로 계산하는 이들의 경멸이었다.
"상무님."
"왜, 뭐 더 필요한가?"
"아니요. 제가 드려야죠." 성훈은 품에서 1년 묵은 사직서를 꺼냈다. 그리고 식권 50장 뭉치 위에 사직서를 덮어 상무 쪽으로 밀었다.
"맛있는 점심은 이 식권으로 상무님이 드시고 건강하세요. 전 이제 제 인생을 다시 설계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 이봐! 김 팀장! 자네 미쳤어?" 상무의 고함이 등 뒤에서 터졌다. 성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쾅- 육중한 철문이 닫히며 사무실의 소음이 차단되었다. 복도는 고요했다. 그제야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고, 손끝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42세 남자의 객기. 대책 없는 퇴사. 현실의 공포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려던 찰나였다. 성훈은 재킷 안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5억짜리 카드와 함께, 연구소에서 지급받은 납작하고 차가운 검은색 기기가 들어 있었다. [N-Link (Neural Link Device)]에어팟보다 작고 버튼 하나 없는 매끈한 조약돌 모양의 단말기. 이것은 도연(Y-143)과 성훈을 연결하는 신경망이자, 성훈의 심박수, 음성, 위치, 주변 상황을 실시간으로 도연에게 전송하는 송신기다. 성훈은 떨리는 손으로 기기를 귀에 꽂고 중앙을 꾹 눌렀다. 웅- 짧고 묵직한 진동.
"......도연..."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기기에서 도연의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피커가 아닌, 골전도 방식을 통해 귓속으로 직접 꽂히는 선명한 음성.
[- 파트너님. 심박수 150bpm. 코르티솔 수치 급증. 음성 패턴 분석 결과 '극도의 흥분' 및 '해방감'이 감지되었습니다.]
"어... 나 저질렀어. 사표 냈다구."
[- 알고 있습니다. 24시간 저와 연결되는 N-Link를 통해 상무와의 대화 내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했습니다. '식권 50장'이라는 키워드에서 파트너님의 감정 임계점이 돌파된 것으로 판독됩니다.]도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히려 그 건조함이 성훈을 진정시켰다.
[- 잘하셨습니다. 자신의 존엄을 6천 원으로 계산하는 집단에 머무르는 것은 인생 낭비입니다. 지금 로비로 내려오세요. 정문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알았어. 지금 갈게." 성훈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 동시에 벼랑 끝에 선 남자의 얼굴이었다. 협회 건물 1층 로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점심시간을 맞아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로 로비가 북적였다. 낡은 회색 패딩을 입은 성훈은 그 인파 속에 섞여 회전문을 밀고 나갔다. 그때였다. 회전문 바로 앞, 검은색 벤(Van)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그리고 뒷좌석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내렸다. 도연이었다. 어제 연구소에서의 모습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세련된 모습. 짙은 네이비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명품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도회적인 여성. 그녀는 성훈을 발견하자마자,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성훈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마치 오랫동안 내조해 온 아내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고생했어요, 여보." 성훈이 움찔하며 물러서려 하자, 도연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N-Link를 통해 당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실패한 퇴사자'가 아니라, '더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능력남'의 이미지입니다. 제 리드에 따르세요." 도연은 성훈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따뜻했다. 로봇의 팔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온기. 지나가던 사람들 중 몇몇이 힐끗거리며 수근거렸다. '어? 저거 기획팀 김 팀장 아냐? 와... 부인인가? 엄청 미인인데?' 경멸과 무시가 호기심과 부러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성훈은 허리를 폈다. 도연이, 아니 인류 최고의 첨단기술이 그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가시죠." 도연이 성훈을 이끌었다.
"어디로?" "당신의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러요." 도연의 시선이 길 건너편, 붉은색 철골 구조물이 번쩍이는 [더현대 서울]을 향했다.
"식권 50장을 거절한 남자가 입기에, 지금 그 패딩은 너무 가볍거든요." 성훈은 귀속의 N-Link 단말기를 어루만졌다. 이 작은 기계가 자신의 모든 비참함을 도연에게 전송했고, 도연은 그것을 완벽한 '솔루션'으로 바꿔서 눈앞에 나타났다.
"그래... 가자." 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초라한 과거(협회)에서 화려한 욕망(백화점)으로 건너가는, 가장 짧고도 긴 횡단이었다.
여의도, 더현대 서울 1층. 회전문이 돌고, 성훈은 다른 차원의 대기로 진입했다. 바깥세상의 거칠고 매연 섞인 바람은 두꺼운 유리벽 뒤로 차단되었다. 이곳의 공기는 적정 습도 45%, 온도 22도로 조율되어 있었으며, 은은한 시트러스 향이 자본의 냄새처럼 떠다녔다. 성훈은 잠시 멈칫했다. 대리석 바닥에 비친 자신의 모습—5년 된 낡은 회색 패딩, 무릎 나온 정장 바지—이 이곳의 눈부신 조명 아래서 유난히 이질적인 얼룩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습관처럼 어깨를 웅크렸다. 지난 15년 동안 예산 삭감 통보를 받을 때마다 취해온, 패배자의 자세였다.
[- 파트너님. 어깨 펴세요. 당신의 심박수가 불안정합니다.]귓속의 N-Link를 통해 도연의 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옆에 선 도연이 성훈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30대 초반의 우아한 여성과 42세의 남루한 남자. 그 기묘한 부조화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가요, 여보." 도연이 육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주변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한, 의도적인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들은 빛의 중심부, [몽클레르 (MONCLER)] 매장 앞으로 걸어갔다. 검은색 벨벳 라인 뒤로 대기 줄이 길었다. 하지만 도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입구의 직원에게 가볍게 눈짓하자, 직원은 홀린 듯 벨벳 라인을 열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데이터, 즉 '구매력 있어 보이는 아우라'가 통행증이었다. 매장 안은 고요했다. 검은색 패딩들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우아하게 걸려 있었다. 성훈은 행거에 걸린 숏 패딩 하나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몽클레르 마야(Maya) - 999 Black]차가웠다. 그리고 매끄러웠다. '나일론 라케(Nylon Laqué)'. 도연의 데이터베이스는 이 소재가 석유 화합물인 폴리아미드에 불과하다고 정의했지만, 성훈의 손끝에 닿은 그것은 마치 액체로 된 보석 같았다. 백화점의 조명을 머금었다가 묵직하게 뱉어내는 검은 광택. 그것은 옷감이 아니라, 세상의 무시를 튕겨낼 수 있는 단단한 갑옷처럼 보였다.
"입어보시겠습니까?" 직원이 다가왔다. 성훈은 자신의 낡은 회색 패딩을 벗었다. 솜이 다 죽어 얇은 종잇장 같은 그 옷이 직원의 손에 들려 축 늘어졌다. 성훈의 지난 42년 인생이 그렇게 들려 있는 것만 같았다. 성훈은 새 패딩에 팔을 넣었다.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지퍼를 올리는 순간, 등 뒤에서부터 묵직한 온기가 차올랐다. 거위結界의 솜털이 만든 공기층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부드럽게 격리시키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섰다. 왼쪽 팔뚝에 박힌 몽클레르의 펠트 로고. 알프스 산맥을 형상화했다는 그 작은 천 조각이, 거울 속 남자를 전혀 다른 존재로 정의하고 있었다. 식권 50장을 거절한 남자의 눈빛이, 검은 갑옷을 입고 비로소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잘 어울려요." 도연이 거울 속 성훈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완벽한 아내의 그것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직원이 물었다. 성훈은 자신의 낡은 회색 패딩을 들고 있는 직원을 보았다. 그 옷이 마치 전생의 유물처럼 느껴졌다.
"이거... 얼마죠?" "네, 현재 매장가는 265만 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265만 원. 성훈이 몇 달을 꼬박 모아야 만질 수 있는 비상금의 액수. 누군가에게는 한 달의 생계비. 하지만 지금 그의 안주머니에는 5억이라는 숫자가 찍힌 플라스틱이 들어 있다.
"이걸로 하죠" 성훈이 대뜸 말했다.
"어휴 여보, 다른 것도 좀 입어봐요, 지금 너무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도연이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성훈은 떨리는 손으로, 최대한 태연한 척 [MBIDIA BLACK] 카드를 내밀었다. 묵직한 메탈 카드가 직원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시불로 해주세요." 그 말을 뱉는 순간, 성훈의 뇌하수체에서 전례 없는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결제가 진행되는 동안, 성훈은 직원이 들고 있던 자신의 낡은 패딩을 가리켰다.
"아, 그리고 저 옷은..." 성훈은 잠시 망설였다. 5년간 함께 여의도 칼바람을 막아준 전우였다.
"그냥 버려주세요. 입고 갈게요." 직원은 미소 지으며 성훈의 낡은 패딩을 구석으로 치웠다.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그의 옛 껍질. 성훈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도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자." 매장을 나서는 성훈의 등은 곧게 펴져 있었다. 번쩍이는 검은색 패딩이 조명을 반사하며 그를 빛나게 했다. 도연은 그의 뒤를 따르며,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로그를 띄웠다.
- 품목: 몽클레르 마야 다운 재킷.
- 가격: 2,650,000원.
- 기능적 가치: 보온 (기존 15만 원 패딩 대비 20% 향상).
- 심리적 가치: 자존감 회복, 계급 상승의 착각
- 총평 : 파트너는 체온을 1도 올리기 위해 기존 패딩의 17
배를 지불했음. 자본주의 사회의 '전투복(Armor)'을 구매한 행위로 판단됨. 에스컬레이터 앞에 선 성훈이 도연을 보며 물었다.
"도연" "네, 여보" 도연이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배고프다. 結界성훈은 몽클레르 위로 자신의 아랫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265만 원짜리 갑옷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그곳에 있었다.
"안내할게요. 도파민과 나트륨의 성지로.“
더현대 서울 지하 2층, 크리에이티브 그라운드. 에스컬레이터가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의 밀도가 바뀌었다. 1층의 은은한 시트러스 향은 사라지고, 베이스가 쿵쿵 울리는 힙합 비트와 수백 명의 젊음이 내뿜는 열기가 뒤섞여 올라왔다.
"여긴... 정말 다른 나라 같네" 성훈은 몽클레르 깃을 여미며 중얼거렸다. 지하 2층은 거대한 지하 벙커였다. 이곳을 점령한 것은 20대들이었다. 바닥을 쓸고 다니는 통 넓은 바지, 배꼽이 훤히 보이는 크롭티, 귀를 덮은 거대한 헤드폰. 그들의 자유분방함 앞에서 성훈의 265만 원짜리 새 패딩은 갑자기 촌스러운 '아저씨의 등산복'처럼 느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도연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 파트너님. 위축되지 마십시오. 당신의 옷은 이곳의 어떤 ' 힙'보다 비싼 제품입니다.]N-Link를 통해 도연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기가 빨려서 그래, 기가." 그들은 인파를 헤치고 지하 1층 [파이브가이즈] 매장 앞으로 향했다. 붉은색과 흰색 타일로 장식된 매장. 입구에는 이미 긴 줄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진동하는 고소한 땅콩기름 냄새. 그것은 배고픈 짐승들을 유혹하는 페로몬이었다.
"대기 인원 25팀... 햄버거 하나 먹자고 이걸 기다린다고?" 성훈이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곳의 젊은 세대에게 '대기(Waiting)'는 지불해야 할 비용이 아니라, '인증(Certification)'을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줄을 서 있는 시간조차 그들에겐 콘텐츠니까요.]
"콘텐츠고 뭐고 배고파 죽겠네, 일단 줄 서자." 성훈은 대기 줄 틈에 섰다. 주변의 20대들이 힐끗거렸다. '저 아저씨는 뭔데 저런 미인이랑 왔어?' 하는 시선들. 성훈은 짐짓 여유로운 척 도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도연의 어깨 근육이 미세하게 수축하며 그의 손을 지지했다.)한참을 기다린 후 드디어 입장. 매장 안은 말 그대로 시장바닥이었다. 붉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주문을 복창하며 소리를 질러댔고, 사람들은 최대한 벌린 입으로 버거를 밀어넣고 있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성훈은 메뉴판 앞에서 얼어붙었다. 토핑은 뭘 넣어야 하고, 쉐이크는 또 왜 이렇게 복잡한가. 도연이 자연스럽게 나섰다.
"베이컨 치즈버거 두 개. 토핑은 '올 더 웨이(All the way)'. 감자튀김은 리틀 사이즈, 케이준 스타일로. 그리고 밀크쉐이크랑 콜라 하나 주세요." 직원의 손가락이 포스기 위에서 춤을 췄다.
"총 54,500원입니다." 성훈의 눈썹이 꿈틀했다. '햄버거 두 개에 5만 4천원... 성훈은...' 속으로 식권이 몇 장인지 계산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잠시 후, 기름이 잔뜩 밴 누런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성훈은 은박지에 싸인 묵직한 버거를 꺼냈다. 뜨거웠다. 치즈와 육즙이 흘러넘쳐 손가락을 적셨다.
"먹자." 성훈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콰직. 쥬륵.
"으음...!" 미간이 좁혀졌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혀를 폭행하는 듯한 강렬함 때문이었다. 짜고, 기름지고, 고소한 맛의 폭격. 혈관이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뇌하수체에서는 쾌락 호르몬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이거... 완전 미친 맛이네." 성훈은 멈출 수 없었다. 며칠간 구내식당 짬밥으로 시들해졌던 미각세포들이 날뛰었다. 그는 감자튀김을 한 주먹 집어 입에 넣었다. 땅콩기름의 고소함이 입안을 코팅했다.
"당신도." 성훈이 도연에게 감자튀김을 내밀었다. 도연은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들고, 먹는 척하며 입가로 가져갔다. (내부의 성분 분석기가 작동했다.)
- 대상: 파이브가이즈 버거 세트 (1인 기준).
- 영양 성분 분석:
- 나트륨: 1,400mg (일일 권장량 50% 초과).
- 지방: 62g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 급증 경고).
- 열량: 1,060kcal (남성 하루 필요 열량의 50%).
- 당류: 밀크쉐이크 포함 85g (인슐린 스파이크 유발).
- 행동 심리 분석: 영양 공급을 위한 식사가 아님. '식용 도파민
(Edible Dopamine)'. 인간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혈관 내벽을 담보로 짠맛의 유희를 즐김. [CAUTION & SOLUTION] 파트너를 위한 건강 조언:- 즉시 처방: 식사 후 최소 500ml 이상의 물을 섭취하여 혈중 나트륨 농도를 희석할 것. - 칼륨 보충: 귀가 후 코코넛 워터, 바나나, 토마토 등 칼륨이 풍부한 음식을 섭취하여 나트륨 배출을 유도해야 함. - 혈당 관리: 인슐린 저항성을 낮추기 위해 식사 직후 20분 이상의 가벼운 걷기가 필수적임. (택시 탑승 금지 권고). - 다음 식사: '최소 16시간 공복(간헐적 단식)'을 유지하거나, 식이섬유 위주의 샐러드로 대체할 것을 권장.
"여보, 물 좀 많이 마셔요." 도연이 성훈에게 물컵을 밀어주며 나직이 말했다.
"어? 갑자기 웬 물?" "지금 드신 나트륨 양이면, 오늘 밤 당신의 신장이 야근을 해야 하거든요. 얼굴 붓기 싫으시면 지금 씻어내요."
"아... 고마워." 성훈은 영문도 모른 채 도연이 주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AI 아내는 남편의 혈관 건강까지 실시간으로 케어하고 있었다. Interlude. 모니터 뒤의 관찰자들: 엠비디아 코리아 R&D 센터, [데이터 상황실]어두컴컴한 상황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 수십 개의 데이터 그래프가 요동치고 있었다. 화면 중앙에는 'Y-143(도연)'의 시각 센서가 전송하는 실시간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화면 속에서 성훈은 입가에 케첩을 묻힌 채 행복한 표정으로 햄버거를 씹고 있었다.
"보십시오, 미셸 님. '구매' 순간의 동공 확장 수치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수석 연구원 미셸 김은 팔짱을 낀 채 화면을 응시했다. [DATA STREAM: Subject Kim Seong-hun]스트레스 지수: -45% (감소). 소비 쾌락 지수: +85% (급증). 건강 리스크: +60% (증가).
"흥미롭군요." 미셸이 중얼거렸다.
"겨우 265만 원짜리 패딩과 5만 원짜리 햄버거에 이 정도의 생체 반응이라니. 인간은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쾌락을 위해 지갑을 엽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비합리적 소비 알고리즘'의 핵심이에요."
"이 데이터가 본사로 전송되면 어떻게 쓰입니까?" 연구원이 물었다. 미셸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단순한 쇼핑 기록이 아니에요. 우리는 지금 '인간 욕망의 지도(Map of Desire)'를 그리고 있는 겁니다. 언제 지갑을 여는지, 어떤 결핍이 있을 때 비싼 물건을 사는지... 이 패턴이 완성되면, 전 세계 모든 쇼핑몰과 광고 시스템에 탑재될 '거부할 수 없는 알고리즘'을 완성하게 될 겁니다." 화면 속에서 성훈이 햄버거 포장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그의 눈이 다시금 공허하게 흔들리는 것이 8K 화질로 포착되었다.
"보세요. 도파민이 떨어지고 있어요." 미셸이 화면을 확대했다.
"공허함이 찾아왔군요. 저 남자는 곧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더 비싸고, 더 반짝이는 것을 찾게 될 겁니다. 그때 그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그게 진짜 데이터죠." 미셸은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암호화되어 도연의 N-Link로 전송되지 않고, 오직 도연의 내부 시스템에만 명령어로 입력되었다. [COMMAND: 더 높은 단계의 소비로 유도할 것.]
"하아... 잘 먹었다." 성훈이 기름진 손을 닦으며 일어섰다. 배는 불렀지만, 미셸의 예언대로 그의 눈동자는 다시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이제 어디 갈까? 배도 부르고 옷도 샀는데... 뭔가 계속 허전하네." 성훈은 무심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몽클레르 패딩 소매 아래로 삐져나온, 10년 된 [카시오] 전자시계. 고무 밴드는 하얗게 삭았고, 유리면엔 흠집이 가득했다. 도연의 눈동자에 미셸의 비밀 명령 코드가 아주 잠시, 붉게 점멸했다가 사라졌다. 도연이 성훈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전투복은 완벽한데, 무기가 장난감이네요. 당신의 시간은 이제 6천 원짜리 식권으로 계산될 만큼 저렴하지 않아요." 그녀가 위층을 가리켰다. "올라가요. 당신의 1초를 1만 원의 가치로 만들어줄, 진짜 무기를 사러."
지하 1층의 소음과 햄버거 냄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증발했다. 1층의 공기는 서늘하고 고요했다. 이곳은 오직 '성공한 자들'만을 위해 조율된 무균실 같았다. 성훈은 무의식적으로 몽클레르 패딩 냄새를 맡았다. 새 옷 냄새 사이로 희미하게 밴 땅콩기름 냄새. 그게 거슬렸다. 그들이 멈춘 곳은 검은색과 금색으로 치장된 [TOM FORD BEAUTY] 매장. 섹시함과 퇴폐미의 대명사.
"어서 오세요." 직원이 시향지를 건넸다. 도연은 망설임 없이 가장 유명한 검은색 병을 가리켰다. [오드 우드 (Oud Wood) 100ml]
"뿌려주세요. 직접." 도연이 성훈의 손목을 내밀었다. 직원이 펌핑하자, 차가운 안개가 손목의 맥박 위로 내려앉았다. 코를 대는 순간, 묵직한 침향나무 향이 뇌를 강타했다. 그것은 숲의 냄새가 아니었다. 고급 세단의 가죽 시트, 호텔 라운지의 위스키, 그리고 성공한 남자의 수트에서 날 법한 냄새였다.
"좋네요. 이걸로 주세요." 성훈은 가격표(485,000원)를 보지도 않고 카드를 내밀었다. 결제 후, 그는 매장을 나서자마자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마치 소독하듯 자신의 목덜미와 몽클레르 패딩 위에 향수를 뿌렸다. 칙- 치익-
"여보, 너무 많이 뿌리는 거 아니에요?" 도연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아니. 덮어야 해. 42년 동안 내 몸에 밴 '을(乙)'의 냄새를 완전히 덮으려면 이 한 통을 다 써도 모자라." 성훈의 눈빛이 독기로 번들거렸다. 향수는 그에게 냄새가 아니라
'기억 소거제'였다.
품목: 톰 포드 오드 우드.
성분: 변성 알코올, 정제수, 향료 (침향나무, 샌달우드 등).
분석: 원가의 80% 이상이 브랜드값과 마케팅 비용. 물리적
효용은 '체취 은폐'뿐.
총평: 인간은 알코올 섞인 물에 50만 원을 태우면서 '자신감'
을 샀다고 착각함. 데이터상으로는 그저 비싼 나무 냄새가 나는 중년 남성일 뿐." 이제 오늘의 마지막 퍼즐이 남았다. 도연이 이끈 곳은 [IWC SCHAFFHAUSEN] 매장. '엔지니어의 시계'. 과시보다는 성능과 기술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가진 브랜드. 매장 안은 도서관처럼 정숙했다. 말끔한 수트를 입은 매니저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의 시선이 성훈의 몽클레르 패딩과, 그 옆의 도연을 빠르게 스캔했다. 합격.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모델이 있으십니까?" "포르투기저(Portugieser). 오토매틱 40미리로 보여주세요." 도연이 성훈 대신 전문 용어로 주문했다. 매니저가 벨벳 트레이 위에 시계 하나를 올렸다. 흰색 다이얼, 푸른색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 그리고 짙은 네이비색 악어가죽 스트랩. 화려하진 않지만, 숨 막히게 정교해 보였다. 성훈은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10년 된 [카시오 F-91W]. 고무 밴드는 하얗게 삭아 있었고, 액정엔 기스가 가득했다. 그것은 지난 10년,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며 야근했던 그의 족쇄였다. 성훈은 떨리는 손으로 카시오 시계를 풀었다. 손목에는 시계 자국대로 하얗게 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노동의 문신.
"차보시겠습니까?" 매니저가 IWC 시계를 건넸다. 성훈이 시계를 차는 순간, 묵직한 무게감이 손목을 눌렀다. 단순한 쇳덩이의 무게가 아니었다. 뒷면의 투명한 사파이어 글라스(Sistine Back) 너머로 수백 개의 부품이 맞물려 돌아가는 게 보였다. 째깍, 째깍, 째깍. 그것은 1,130만 원짜리 심장 소리였다. [결제 승인: 11,300,000원]성훈은 매니저에게 말했다. "차고 갈게요. 그리고 저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카시오 시계.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성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몽클레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챙겨갈게요. 가끔... 정신 차려야 할 때 봐야 하니까." 매장을 나서는 성훈의 왼팔은 부자연스럽게 굽혀져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봐주길 바라는, 유치하지만 솔직한 욕망. 성훈은 1층 거울 앞에 섰다. 몽클레르 마야 패딩, 톰 포드 향수의 잔향, 손목에서 빛나는 IWC 시계. 그리고 그 옆에 선 완벽한 미모의 아내 도연. 불과 몇 시간 전, 식권 50장을 받고 분노하던 김 팀장은 세상에 없었다. 거울 속에는 성공한 중년의 사업가 김성훈이 서 있었다.
"어때? 이제 좀 사람 같은가?" 성훈이 거울 속 자신에게 취해 물었다. 도연은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연구소로 데이터를 전송했다.
- 품목: IWC 포르투기저 오토매틱 40.
- 가격: 1,130만 원.
- 일일 오차: -3초 ~ +5초.
- 분석: 파트너는 주머니 속 스마트폰(오차 0.00초)보다 훨
씬 부정확한 기계 장치를 위해 1,130만 원을 지불. 태엽을 감아야만 움직이는 '비효율의 낭만' 구매.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역설적으로 아날로그의 불편함을 가장 비싼 값에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지위 증명.
"완벽해요, 여보." 도연이 성훈의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이제 당신의 겉모습은 완성됐어요.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도연의 비밀 로그>[ENCRYPTED FILE: Human Analysis - Phase 1] - 수신: 엠비디아 R&D 센터 / 미셸 김 수석 연구원 - 발신: Y-143 (도연)[관찰 요약] 파트너 김성훈은 반나절 만에 자신의 1년 치 잉여 자금을 소진. 흥미로운 점은, 그가 구매한 물건들이 하나같이 피부(Skin)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 - 패딩 (제2의 피부)- 향수 (피부의 냄새)- 시계 (손목 위의 문신)그는 껍데기를 바꾸는 중. 외피를 가장 단단하고 비싼 물질로 코팅해 내면의 유약함을 감추려는 심리로 판단됨.